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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건너지 못하는 강 건너

생의 주사위는 던져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운명이건 숙명이건, 피할 수 있거나 피할 수 없거나 인생의 주사위는 던져진다.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 욕망과 좌절, 희망과 절망, 사랑과 이별, 축복과 저주,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인생의 길고도 짧은 희로애락의 강을 번갈아가며 건너간다.   순간의 차이로 명운이 갈라지고 운명의 수레바퀴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아니라 각본 없이 짜여인 원고지의 빈 칸을 채운다.   생명과 죽음을 판정하는 주사위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한 알이 칠흙의 어둠으로 생명을 삼킬 때까지 눈 뜬 장님처럼 살아간다.   주사위 어원은 ‘제비뽑기’다. 영어로는 ‘Dice’인데 작은 상자 모양의 각면에 여섯가지의 점이 새겨져 있는데 바닥에 던져 윗면에 나온 수로 승부를 겨룬다. 인생의 패는 낙장불입(落張不入), 한 번 바닥에 놓아버린 패는 다시 무를 수 없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갈리아 원정을 함께 했던 군사들과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한다. 로마 공화국은 도시국가를 복속시킨 뒤 군사 지휘권을 가진 집정관이 해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을 루비콘 강에서 해산시키고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오게 했다.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 반란을 의미한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루비콘 강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단신으로 올 것을 요구했지만 그럴 경우 원로원에게 암살 당할 것임을 직시한 카이사르는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공화정을 종식시킨다.   라틴어 ‘rubico’는 형용사 ‘rubeus(붉다)에서 기원했는데 진흙 침전물에 의해 강물이 붉은 빛깔을 띠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루비콘강을 건너다.’라는 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봉착했을 때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뜻으로 쓰인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루비콘 강을 건는다. 건너지 말아야 하고,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나든다. 넘어서는 안 되는 산도 목숨 걸고 정복하고, 건너지 못하는 강, 건너서는 안 되는 위험한 강을 겁도 없이 건넌다.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앞날을 장담하지 못해도 순간의 유혹과 탐욕을 참지 못해 나락의 길로 들어선다. 조금만 견디면 해결될 일을 그 시간을 못 참아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다.   죽기 살기로 사랑을 맹세했던 사람과 결별하고 도원결의로 우정을 다짐하던 친구와 등을 돌린다. 동지가 황야의 무법자로 변해 서로 총을 겨누며 루비콘 강을 혼자 건너간다. 루비콘 강은 먼저 건너는 사람이 자살골을 넣는다. 죽고 사는 일 빼고는 생의 주사위는 언제든지 다시 던질 수 있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귀향한다. 바위나 돌, 거센 물살에 찢겨 온몸엔 벌건 상처가 가득해도 거센 강물을 거슬러 목적지에 다다른 연어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마지막 사투를 벌인다. 오직 번식을 위한 힘겨운 여정의 막바지 임무를 완성한 연어들은 사체가 되어 자연으로 회귀한다.   그대여, 사는 것이 모질고 견디기 힘들어도 루비콘 강은 건너지 마요. 대신 강물에 헛된 부귀영화와 좌절, 고통과 슬픔을 떠나 보내세요. 루비콘 강은 죽음의 강입니다, 강 건너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버티며 살아 주세요.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주사위 어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운명이건 숙명이건

2024-11-19

[독자 마당] 물처럼 흐르는 시간

새해를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여섯 달이 지나가고 있다. 6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의 6월이 옛날 로마 달력에서는 넷째 달이었고 날수도 29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날수도 30일로 만들었고 달도 지금처럼 6번째로 고쳤다.   우리는 달을 숫자로 부르기 때문에 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을 인지하기기 편하다. 6월이 되면 12개 달 중 6번째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어의 ‘준(June)’은 숫자와는 상관없는 이름이어서 시간의 흐름을 쉽게 느낄 수 없다.     이름이 고대 로마 결혼의 여신 ‘유노’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로맨틱한 이름이기도 하다.   문득 세월이란 낱말이 더 새삼스러워진다.     세월과 더불어 ‘때’라든가 ‘시간’이란 낱말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아주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느낀다.     때와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과의 운행 관계를 재는 단위이다.     철학적으로는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머물지 않고 같은 빠르기로 이어져 내려간다는 인식의 기본 형식이다. 이는 삶의 길이를 재는 단위임과 아울러 사물이 일어남을 아는 기준이다.   그래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란 사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기본 형식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유명 시인 제임스 휘트컴 라일리의 6월 관련 시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이 아침에 6월이 내 곁에 다가오고 햇빛은 뜨겁게 빛나누나. 이 날의 기쁨을 우리 가슴 속에 가득 채우고 온갖 의심과 근심과 슬픔을 모두 날려 보내세.” 윤경중·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독자 마당 시간 철학자 이마누엘 율리우스 카이사르 옛날 로마

2022-06-21

키케로가 가르쳐준 ‘빛나는 노년’

키케로가 가르쳐준 ‘빛나는 노년’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하루해가 이미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해가 곧 저물려 해도 오히려 귤 향기가 더욱 꽃답다. 한 생애의 말로인 노년은 군자로서 마땅히 백배로 정신을 가다듬을 때이다.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세 달이 모이면 한 계절이 된다. 사계절이 흐르면 일 년이 되고, 그 일 년들이 모여 일생이 된다. 일 년이 사계절이듯, 하루도 사계절이고 일생도 사계절이다. 생로병사가 곧 춘하추동 아닌가. 산다는 건 이 리듬을 따라 흘러가는 일이다. 청년은 청년답게, 노년은 노년답게. 이것이 인생이고 또 자연이다. 어떻게 하면 이 자연스러운 리듬을 구현해낼 것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이 과제를 탐구해왔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于學), 서른에 두 발로 서고(而立), 마흔에 미혹에 빠지지 않고(不惑), 오십엔 천명을 알고(知天命),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欲不踰矩), 이것이 공자가 밟은 생의 스텝이다. 요컨대, 어떤 방식이건 이렇게 리듬을 탈 수 있어야 비로소 노년의 삶이 빛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도 그런 지혜의 산물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인생과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번만 가게 되어 있네.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이렇게 정리하면 노년은 결코 하위개념이 아니다. 청춘이 아무리 아름답고 힘차다 한들 거기에서 원숙함은 불가능하다. 원숙함이란 능력이나 재능 따위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로마제국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자다. 고전라틴 산문의 창조자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대문호다. 〈노년에 관하여〉는 말년에 평생의 친구였던 아티쿠스에게 헌정한 대화록이다. 대화체의 생동감과 라틴어의 운율이 만났기 때문일까. 이 작품은 ‘시보다 더 시적인’ 산문으로 그득하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노년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한다. 노년을 청년의 결핍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쾌락을 즐기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다. “세월이 정말로 젊은 시절의 가장 위험한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준다면, 그것은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쾌락은 인생의 특권이 아니라 약점이란다. 더 나아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역병 가운데 쾌락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오호, 쾌락을 역병에 비유하다니, 그야말로 통념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금욕을 강변하는 것인가. 아니다. 금욕은 어떤 점에서 쾌락의 또 다른 짝이다. 하여 금욕의 기준이 엄격해질수록 쾌락에의 유혹도 커지는 법이다. 쾌락도 금욕도 아니라면 대체 어떤 길이 있을까.  오직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 그 스승은 자연이다.   이미 연로한 소포클레스에게 누군가 물었다. 아직도 성적 접촉을 즐기느냐고. 그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응답. “아이고 맙소사! 사납고 잔인한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제 나는 막 거기서 빠져나왔소이다.”그렇다. 쾌락은 거칠고 난폭하다. 거기에 휘둘리면 노예처럼 끌려 다녀야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이제 그 난폭한 주인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 욕구가 자연스럽게 잦아드니 결핍 또한 없다는 것. 그러므로 노년이란 ‘마음이 성욕과 야망 등 온갖 전투를 다 치르고 난 뒤 자신과 더불어 화해하는 시간’이다. 이런 이치를 터득해가는 것이 지혜다. 노년의 원숙함과 평화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 자연의 이치를 망각할 때 노년은 한없이 비루해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시대가 그렇지 않은가. 동안(童顔)열풍과 성형중독이 보여주듯이, 우리 시대는 오직 젊음에 대한 열광 혹은 늙음에 대한 경멸이 난무한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은 무려 400살이나 먹었음에도 절대동안이다. 그리고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직 첫사랑의 추억 속에서 맴돈다. 당연히 노년의 지혜 같은 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노년에 는 체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노년의 체력 저하는 자연현상으로 슬퍼할 일이 못된다. 오히려 노년기에는 마음과 정신의 연마에 더욱 힘써야 한다. 육체와 달리 정신은 나이가 들어도 갈고 닦을수록 고양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이 되면 일을 못한다고? 큰일은 육체의 힘이나 기민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려와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지.”노년이 죽음으로부터 멀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더 멀리 있지도 않다. 젊었다 해도 오늘 당장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인의 죽음은 익은 과일이 땅에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젊은이의 죽음은 익지 않은 과일을 강제로 따는 것과 같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농부들이 봄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상 죽음을 슬퍼할 이유는 없다.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죽는 것만큼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키케로가 말하는 노년의 삶과 죽음은 자연의 섭리다.  노년은 쇠락과 체념의 시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태어난 것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면 인생은 충분하다. 그는 혼란이 난무하고 혼탁한 속세를 떠나 신성한 영혼들이 모여 있는 하늘로 떠나는 그날을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카토를 만나볼 수 있으리라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이승에 잠깐 소풍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일체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영원불멸이 이어지기 때문에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는 순간이 두려운가. 우리의 삶은 영원의 한 순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그러면 당신 이전에도 당신 이후에도 영원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심연 사이에서 당신은 사흘을 살든 3세기를 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키케로는 공화정 시대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인이었으므로 그의 말 속에는 로마의 국가철학이었던 스토아 사상이 잘 녹아 있다. 스토아철학은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 남성적이고 선이 굵은 승자의 철학이다. 키케로는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를 살았다.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지만 키케로는 전제 군주가 되려는 카이사르의 야심에 반발했다. 키케로는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우스 역시 전제 정치를 펼치며 반대파를 처단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결국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 옳은 것과 안전한 것 사이에서 옳은 것을 택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당했다. 키케로는 결코 '찌질'하지 않았다.             김지민 기자키케로 노년 쾌락도 금욕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정치 활동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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